한글날을 맞아 ‘한글 사용의 혁신’을 살펴보다
1446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그 탄생부터 혁신의 산물이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드는 것을 넘어, 과학적 원리와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한글은 오늘날까지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글은 당시 동아시아 문자 체계와 비교해 일대 혁신을 가져온 문자입니다. 중국의 한자나 일본의 가나와는 달리, 한글은 음소 문자로서 소리의 원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자 습득과 사용을 훨씬 쉽게 만들어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문자였습니다.
단순히 실용적인 측면뿐 아니라 한글에는 철학적, 우주론적 원리까지 담겼습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을 상징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기호의 나열만이 아닌, 우주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문자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글의 과학적 구조부터 현대 기술과의 만남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한글의 혁신성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음과 모음의 기하학적 원리
한글의 기본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①‘ㄱ’은 혀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②‘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③‘ㅁ’은 입술의 모양을 그대로 본떴습니다. ④‘ㅅ’은 이의 모양을 형상화했습니다. ⑤‘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발음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해 다른 자음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ㄱ’에서 ‘ㅋ’이 만들어지고, ‘ㄷ’에서 ‘ㅌ’이 만들어지는 식입니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천지인 사상은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 개념으로, 단군 신화와 홍익인간 사상에서부터 기반이 되는 민족 고유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①‘ㆍ’(점)은 하늘을, ②‘ㅡ’는 땅을, ③‘ㅣ’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세 가지 기본 모음을 조합하여 다양한 모음을 만들어냈습니다. ‘ㅏ’는 ‘ㆍ’와 ‘ㅣ’의 조합이고, ‘ㅜ’는 ‘ㆍ’와 ‘ㅡ’의 조합입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는 한글을 배우는 이들에게 직관적인 이해를 제공합니다. 어린이는 물론 외국인들조차 한글을 쉽게 익힐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구조 덕분입니다.
한글의 발음체계
한글의 자음은 발음 위치와 방법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되며, 이는 현대 음성학의 원리와도 일치하는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발음 위치에 따라 ①어금닛소리(ㄱ, ㅋ): 혀의 뒷부분이 연구개에 닿아 만들어지는 소리 ②잇소리(ㄷ, ㅌ): 혀끝이 윗잇몸에 닿아 만들어지는 소리 ③입술소리(ㅁ, ㅂ, ㅍ): 입술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소리 ④혓소리(ㄴ, ㄹ): 혀를 이용해 만들어지는 소리 ⑤목구멍소리(ㅇ, ㅎ): 목구멍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소리로 분류됩니다.
또 발음 방법에 따라 ①예사소리(ㄱ, ㄷ, ㅂ): 가장 기본이 되는 소리 ②된소리(ㄲ, ㄸ, ㅃ): 예사소리보다 강하게 발음되는 소리 ③거센소리(ㅋ, ㅌ, ㅍ): 강한 기류를 동반하는 소리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체계적 구조는 한글이 음성학적 원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으며, 국제음성기호(IPA)와 유사한 수준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을 통해 다양한 발음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통해 외국어의 발음을 익히는 데도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한글 서체의 변화
한글 창제 이후 한글 서체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미적 취향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술적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글 서체는 현대에 이르러 더욱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손글씨 느낌의 캘리그라피 폰트, 특정 브랜드나 제품을 위해 제작된 커스텀 폰트 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글 창제 당시의 한글 서체는 판본체라고도 부르는 훈민정음체와 궁체로 볼 수 있습니다. ①훈민정음체는 한글 창제 당시의 서체로,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모서리가 둥근 특징을 가집니다. ②궁체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사용된 서체로, 우아하고 섬세한 곡선이 특징입니다.
한글 명조체와 고딕체의 발전 과정
근대로 넘어오며 명조체와 고딕체가 도입됩니다. 명조체는 가로획은 가늘고 세로획은 굵은 대비가 특징이며, 끝부분에 작은 장식(세리프)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전통적이고 격식 있는 인상을 주며, 공식 문서나 책의 본문 등에 주로 사용됩니다. 반면 고딕체는 굵기가 일정한 직선적인 획이 특징이며, 끝부분에 장식이 없습니다(산세리프). 따라서 포스터, 광고, 웹 디자인 등 현대적이고 간결한 느낌이 필요한 곳에 자주 사용됩니다.
두 서체의 차이는 각각의 용도와 사용 환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독성이 중요한 경우에는 명조체가 선호되었고, 짧고 강렬한 메시지 전달이 필요한 경우에는 고딕체가 더 효과적입니다. 크게 이 두 서체를 중심으로 서체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1920년대 초반, 한글 활자체는 아직 표준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목활자나 납활자를 사용했으며, 특정한 명칭으로 불리는 표준화된 서체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용된 활자체는 주로 한자 활자를 기반으로 한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원모는 최초로 한자 명조체를 한글에 적용한 ‘동아일보 이원모체’를 디자인했습니다. 1928년 <동아일보> 활자체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 서체는 한자 명조의 성격을 그대로 살려 만든 한글 활자체로, 신문전용으로 세로쓰기에 맞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서체는 193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의 제목과 본문에 처음 등장하여 1950년 6.25전쟁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원모체는 최정호체로 연결되는 한글 명조 활자체 계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원모에 이어 박경서는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의 의뢰를 받아 1936년 새로운 한글 활자를 개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늘날 한글 서체의 바탕을 이루는 업적을 이뤘습니다. 그는 궁체 한글 활자를 다듬어 명조활자를 완성했고, 세로짜기를 위한 한글 네모틀과, 글자의 기둥 맞추기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1936년 이후에도 개발된 박경서 4호, 5호 활자는 광복 후 국정교과서를 비롯해 많은 인쇄 매체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산업화를 위한 한글 서체 개발
광복 이후, 한글 서체는 더욱 발전했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조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정호는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명조체의 틀을 만든 인물입니다. 최정호는 1956년에 민간업체로서 최초로 벤톤 자모 조각기를 들여온 동아출판사로부터 원도 제작을 의뢰 받게 됩니다. 한글 궁체 활자꼴에 일본어 히라가나의 글자 줄기 모양을 덧붙인 ‘한글명조’의 원도를 완성했습니다. 가독성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글자 모양을 가진 서체로 상당한 인기를 모았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최정호는 1969년 일본 모리사와에서 사식원도를 배워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1970년부터 SK한글 원도를 제작해 사식용 원도 제작에도 공헌했습니다. 이후 명조체와 고딕체 등 최정호가 만든 대표적인 서체는 현재까지도 가장 일반적인 서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정호와 함께 한글 서체 개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서체 디자이너로 최정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정호가 출판 활자 분야에서 활약했던 반면, 최정순은 신문 활자에서 큰 활약을 했습니다. 1954년에 문교부가 주관한 교과서용 활자체 개량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활자서체 설계법과 자모조각 기계 조작법을 연수 받은 그는 국산 활자기를 생산해 한글 교과서 서체를 개발했고, 1965년부터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부산일보> 등 다수의 신문 서체를 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본문 바탕체와 본문 돋움체, 제목 돋움체와 제목 바탕체, 옛한글 바탕체를 연이어 개발했습니다. 50년 동안 서체 개발 31만여 자, 신문사 서체를 수정하고 감수한 것이 90여만 자, 신문사 디스플레이용 비트맵 폰트를 수정, 감수한 양만 380만 자에 이르고 있어 규모와 수적인 면에서 따라갈 자가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깁니다.
디지털화되는 현대의 한글
한글의 디지털화는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시작되었고 스마트기기의 발전에 따라 지속적인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 두벌식 자판과 세벌식 자판 체계가 개발됩니다.
두벌식 자판은 초기 컴퓨터에서 주로 사용된 입력 방식으로,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여 입력합니다. ‘ㄱ’과 ‘ㅏ’를 따로 입력하여 ‘가’를 만드는 식입니다. 나중에 개발된 세벌식 자판은 초성, 중성, 종성을 구분하여 입력하는 방식으로 ‘ㄱ’, ‘ㅏ’, ‘ㄱ’을 순서대로 입력하여 ‘각’을 만드는 식입니다. 세벌식이 한글의 구조를 더 잘 반영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두벌식이 먼저 보급되어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많았던 관계로 현재는 두벌식 자판이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스마트 기기에서는 물리적 키보드가 아닌 화면 터치로 입력하는 방식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스마트 기기의 크기 차이에 따른 한글 입력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①쿼티 키보드 배열: 영문 쿼티 키보드 배열을 기본으로 하되, 한글 자음과 모음을 배치하여 사용합니다. ②천지인, 나랏글 등 다양한 입력 방식: 스마트폰 제조사나 사용자의 선호도에 따라 다양한 한글 입력 방식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밖에 빅데이터와 AI 기술을 활용하여 사용자의 입력 패턴을 학습하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을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자동완성기능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새로운 한글 사용의 혁신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AI 기반 예측 입력과 음성인식
한글 입력 시스템의 발전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글의 구조적 특성을 더욱 잘 활용하고, 사용자의 편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한글의 과학성과 실용성이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고로 향후 한글 사용의 혁신은 다음의 4가지 지점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①컨텍스트 기반 예측 입력: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고 적절한 단어나 문장을 제안하는 고도화된 AI 기술이 적용될 전망입니다.
②개인화된 입력 시스템: 사용자의 어휘 사용 패턴, 문체 등을 학습하여 개인에게 최적화된 입력 환경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③고정밀 음성인식: 발음의 미세한 차이까지 인식할 수 있는 고도화된 음성인식 기술로, 말하는 대로 정확하게 텍스트화하는 기술이 발전할 것입니다.
④다국어 통합 입력 시스템: 한글과 외국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입력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글은 창제 이후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하며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 왔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서도 지속적인 혁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에 시대가 변하더라도 과학성, 체계성, 대중성과 같은 한글의 본질적 가치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계승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