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에 대해 공부하다

자료를 뒤적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이라고 적어 둔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국가의 국민이다 보니 항일투쟁과 해방에만 관심을 가졌지, 당시의 동아시아 상황까지는 관심을 갖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국 사람들도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을 원수로 여기고 있음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중일전쟁은 어떻게 발발하게 되었을까요?

발발 원인과 전개과정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등장하는 자료들을 꼼꼼히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끝나고 제국주의 팽창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던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아시아 전역을 땅따먹기 하듯 분할하기 시작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 땅따먹기에 동참하며 비극의 씨앗을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고 36년의 식민지 시대를 겪는 사이,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을 향한 전진 기지로 삼았고,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된 타이완 또한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 7일 밤, 루거우차오(盧溝橋) 인근에서 일본군 부대가 야간 훈련을 하던 중 정체불명의 총소리가 울렸고, 1명의 병사가 실종됩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사격이라고 주장했지만, 중국 측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총격과 병사의 실종을 빌미로 일본군은 완핑현성(宛平縣城)으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이를 중국군이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해프닝에서 벌어진 국지전으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일시적이지만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군부 강경파들은 이 사건을 중국 전역으로 침공하기 위한 기회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7월 28일, 일본군은 베이징을 점령했고, 이어서 7월 30일엔 톈진(天津)도 함락됩니다. 8월 13일에는 상하이 전투가 시작되며 중국군 80만 명, 일본군 30만 명이 3개월간 격돌하며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태평양 전선으로 확대되었고, 무려 8년 간 3,800만 명을 희생하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루거우차오(盧溝橋)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현장인 ‘루거우차오(盧溝橋)’는 중국 베이징 서남쪽 융딩허(永定河; 융딩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베이징에서 약 15km 떨어진 펑타이(豐台) 구에 있습니다. 길이 267미터, 폭 7.5미터, 11개의 아치와 난간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501기의 사자상이 특징인 화강암 건축물입니다.

‘루거우차오(盧溝橋)’는 오랜 역사를 지닌 장소이기도 합니다. 중국 금나라 때 제4대 군주인 해릉양왕이 ‘중도대흥부’(현재의 베이징)로 천도했는데, 그 직후인 1192년에 건설되었으니 무려 832년이나 된 교량입니다. 이후 13세기 무렵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건국하며 이 도시를 수도로 삼고 ‘대도’라 불렀는데, 당시 마르코 폴로가 방문했고 ‘동방견문록’을 통해 루어우차오를 소개했는데 이에 따라 서구 사회에는 ‘마르코 폴로 다리’로 알려졌습니다.

루거우차오 (출처: 위키피디아)
루거우차오의 사자상 (출처: 픽사베이)

◆충분히 예견된 중일전쟁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와 더불어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고 있었고, 반면 중국 대륙은 청나라의 몰락 이후 중국은 군벌들의 할거와 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동북부를 장악합니다. 본격적인 대륙 침략 정책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주국 설립 이후에도 1933년 열하사변, 1935년 화북 분리공작 등을 통해 일본은 중국 북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27년부터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위협이 커지자 1936년 시안사건을 계기로 양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전선을 구축하던 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

중일전쟁 발발 당시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라 이 상황을 방관하려 했지만, 난징대학살과 같은 일본의 잔혹 행위가 알려지며 중국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소련은 1937년 중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고 차관과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미국은 초기에 중립을 표방했지만, 점차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에는 의회에서 대일수출 금지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1941년에는 중국에 대규모 차관과 무기를 지원하게 됩니다.

미국을 위시한 경제 제재로 곤란해진 일본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화민국을 두고 ‘ABCD 포위망’이라고 칭했고, 이들 국가에 대해 맞선다는 명분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킵니다. 결국 중일전쟁의 발발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도 이어지는군요.

◆정리하며

1937년 7월 7일 심야에 벌어진 루거우차오 사건의 전말은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으로 벌어졌습니다. 총격이 일어난 후 인원파악 결과 1명의 병사가 실종되어 상부에 보고했지만, 실종된 줄 알았던 병사는 20분 후 대열로 돌아왔습니다. 1명의 병사를 찾겠다는 구실로 중국군과 대치가 시작되고 한참 지난 후에야 병사를 찾았다는 사실이 상부에 보고되는데, 보고하지 않았던 건 “병사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다”는 석연찮은 이유였습니다.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 중국의 오랜 내전, 게다가 이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지휘관은 “일본인은 원래 초식을 했다”며 군수물자 없이도 풀을 뜯어먹으면 된다고 원정을 강행할 정도로 무능했던 무타구치 렌야였고, 중국군 역시 지휘체계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총격은 누구의 소행인지, 20분간의 실종 사건은 우연인지, 모종의 음모인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아 사건의 원인은 87년째 미궁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모르는 걸 공부해보려 했던 건데, 궁금한 게 더 많아지는군요. 새로운 공부로 돌아오겠습니다.